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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계율을 깨다》

제25장. 잊혀진 진실의 방

by digital-nagane 2025. 3. 28.

제25장. 잊혀진 진실의 방

 

 

모래의 수호자가 마지막 포효와 함께 사라진 뒤, 방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레나와 칼릭 역시 온몸이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빛났다. 전투의 여운은 길게 남았고, 그들의 발밑에는 붕괴된 모래 조형물의 흔적이 흩어져 있었다.

 

끝난 걸까?” 레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대답 대신, 수호자가 있던 제단 뒤편의 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요한 진동과 함께 감춰져 있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는 어둠으로 가득했고, 빛 한 줄기도 스며들지 않았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봉인된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아렌은 벨루미아가 담긴 작은 유리관을 조심스레 꺼내어 확인했다. 보랏빛 꽃잎은 여전히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이 문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아렌은 말없이 앞장섰다. 레나와 칼릭이 그 뒤를 따랐다.

 

회랑을 걷는 동안 그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벽에는 먼지 낀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눈동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을 감시하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이따금 빛을 머금듯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것은 오래전 잊혀진 신들의 이름과 계율, 그리고 인간과 맺은 계약의 흔적이었다.

 

회랑의 끝에는 커다란 원형의 방이 있었다. 정중앙에는 낮은 제단이 있고, 그 위에는 검은색 수정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신비한 기운이 공간 전체를 감쌌고, 순간 아렌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아주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무언가가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레나와 칼릭 역시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마치 신의 숨결이 아직도 머무는 성소 같았다.

 

"이건... 그냥 유물이 아니야." 아렌은 조심스럽게 수정구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고, 수정구가 빛을 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주변의 석상들이 진동했고, 바닥에 그려진 고대 문양이 순식간에 불빛으로 가득 찼다. 제단 위에서 떠오른 빛 속에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과거였다. 신들과 인간이 함께 살던 시절, 세 개의 왕국이 태동하던 시기, 그리고 신들이 직접 인간 세계에 간섭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영상은 마치 생생한 기억처럼 흐르고, 아렌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신들은 인간과 계약을 맺었고, 그 계약은 지혜의 왕국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간은 그 힘을 탐했고, 신을 배신했다.

 

보아라, 선택받은 자여.”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신들이 떠난 것이 아닌, 떠밀려난 것임을.”

 

아렌은 숨을 삼켰다. 영상 속에는 지혜의 왕국의 초기 귀족들이 보였다. 그들은 신들과 계약을 맺은 자들이었으나, 곧 그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신들의 힘을 봉인하고, 기억을 왜곡한 자들이었다. 신들의 이름은 금기시되었고, 그들이 남긴 진실은 오랜 세월 유적으로 덮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었고, 진실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인물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렌과 닮은 얼굴. 하지만 그 눈빛은 차갑고도 강했다. 마치 오랜 세월을 짊어진 존재처럼,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너의 조상이다. 신의 계약을 마지막으로 이어받은 자. 그러나 배신당했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

 

아렌은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단순한 농부의 후손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진실의 계보를 잇는 자였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복수심으로 시작된 여정은 이제 다른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는 단지 귀족의 악행을 파헤치려 했을 뿐이지만, 이 세계의 균형과 진실에 발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은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감당할 운명이다.”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졌다.

 

그때, 수정구의 빛이 꺼지고 방 안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그러나 아렌의 눈에는 이제 새로운 길이 보이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조차 달라져 있었다. 벽면에 있던 문양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제단 뒤편의 벽을 열었고, 그 너머에는 또 다른 회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옆에서 숨죽이며 모든 것을 지켜본 레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칼릭이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찾아 헤매던 모든 해답이 이 안에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진실이라는 건... 항상 대가를 요구하지."

 

아렌은 천천히 일어섰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허리춤에 고이 간직해둔 벨루미아가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꽃이 아니라, 신들과의 인연을 상징하는 살아 있는 증표였다.

 

"진실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외면할 수는 없어. 이제... 나의 길을 제대로 찾아야 할 때야."

 

그 순간, 제단 뒤편의 벽이 완전히 열리며 새로운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고대의 노랫소리 같은 환청이 귓가를 스쳤다. 더 깊은 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세상을 뒤흔들 힘을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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