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릴 때, 아렌은 예상치 못한 따뜻함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전까지의 공간들이 차갑고 음산했다면, 이곳은 마치 봄날의 숲처럼 온기가 감돌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섰고, 레나와 칼릭도 뒤를 따랐다.
빛이 흘러나오던 공간은 단순한 방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떠다니는 조각들이 공중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고, 각각은 기억의 파편처럼 빛을 머금고 있었다.
벽도, 바닥도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들 사이를 걷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칼릭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억 속에 들어온 거야.”
아렌은 손에 쥔 벨루미아를 바라보았다.
꽃잎은 고요히 흔들리며 빛을 내고 있었고, 그 빛이 가까운 기억 조각 하나를 자극하자, 그 안에서 영상이 피어났다.
그들은 눈앞에서 과거를 목격했다.
지혜의 왕국이 아직 태동하던 시기, 신들과 인간이 함께 모여 새로운 질서를 논하던 장면이었다.
한 신이 중심에 서 있었고,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자가 있었다.
바로 아렌의 조상이었다.
“신의 힘을 인간에게 나누는 것은 위험하다.”
어떤 신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약속했소. 이 땅을 다스릴 책임을 나눠지기로.”
아렌의 조상이 대답했다.
그의 음성은 강했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또 다른 조각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배신이 있었다.
귀족들이 모여 신들의 힘을 봉인하려는 비밀 회합. 그 중심에는 한 인물이 있었다.
아렌이 알던 귀족 가문의 상징을 지닌 자였다.
“이 힘은 신들에게서 인간의 손으로 넘어와야 해. 그래야 우리가 통치할 수 있지.”
그리고 그날 밤, 신전은 불타올랐다.
신들의 목소리는 지워졌고, 기억은 조작되었다.
살아남은 자들만이 이 진실을 은폐한 채 세상의 역사를 다시 썼다.
아렌은 숨을 삼켰다.
자신의 조상은 진실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배신당했고 잊혀졌다.
지금까지 이어진 지배 구조는 거짓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이걸… 전부 세상에 드러내야 할까?” 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벨루미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순간, 꽃이 한층 더 짙은 빛을 내며 마지막 기억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린 시절, 숲에서 길을 잃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던 그 숲 한가운데, 그는 처음으로 벨루미아를 보았다.
그때 들렸던 목소리.
“진실을 볼 자, 네가 선택될 것이다.”
그것은 신의 목소리였다.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세 사람은 다시 방의 중심으로 돌아와 있었다.
떠다니던 조각들은 모두 사라졌고, 바닥에는 하나의 문양만이 남아 있었다.
세 개의 왕국을 상징하는 삼각의 표식.
그 중심에 벨루미아가 놓여 있었다.
아렌은 무릎을 꿇고 꽃을 다시 손에 쥐었다.
“나는 이 진실을 숨기지 않겠어. 나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제야 알았으니까.”
레나와 칼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발 아래에서 문양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고, 새로운 길이 열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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