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계율을 깨다》

제23장: 먼 기억의 바람

digital-nagane 2025. 3. 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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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먼 기억의 바람

 

새벽의 햇살이 들판을 따스하게 감쌌다.

이슬이 맺힌 풀잎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천천히 깨어나는 세상을 알리고 있었다.

아렌은 언덕 아래로 내려와, 레나와 칼릭 곁에 섰다.

모닥불은 이미 꺼졌고, 그 위엔 따끈한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레나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우리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겠지.” 아렌이 대답했다.

그들은 짐을 정리하고, 새로 돋아난 작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길은 숲과 개울을 지나, 오래된 돌다리로 이어졌다.

다리 너머에는 오래전 버려진 듯한 폐허가 있었는데, 돌담엔 여전히 희미한 문양이 남아 있었다.

 

“여긴…” 칼릭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예전엔 사제들이 머물던 곳 같군.”

그들은 폐허 안으로 들어갔다.

기둥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 속에서, 시간에 깎인 벽화와 깨진 석상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아렌은 벽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 속에서,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곳도 신들의 흔적이 있는 곳이야.” 아렌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폐허일 뿐.” 레나가 뒤를 이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수는 있지만, 그 안에 갇혀선 안 돼.”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폐허의 중심, 오래된 제단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돌판이 흔들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렌이 그것을 집어 들자, 돌판 아래에 감춰져 있던 오래된 편지 조각이 나타났다.

그 위엔 희미한 문자로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의 신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노래로 남는다.”

레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건… 누군가 남긴 마지막 기록일지도 몰라.”

아렌은 편지를 가슴에 품었다.

“이제 우리도 기억을 남겨야 할 때야.

잊혀진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그날 밤, 그들은 폐허 한가운데에 불을 피웠다.

새롭게 태어난 세계에서, 처음으로 과거를 위한 작은 제례를 지내는 것이었다.

돌무더기를 쌓고, 그 위에 벨루미아의 잎을 얹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손을 모았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자.”

“사라진 자들을 위해.”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하늘엔 별이 떠 있었고, 바람은 폐허의 돌담을 따라 부드럽게 스쳐갔다.

먼 기억이 담긴 바람이었다.


그 이후로도 며칠간, 세 사람은 이곳에 머물렀다.

낮에는 들판을 거닐고, 밤에는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렌은 작은 공책을 꺼내 하루하루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고, 레나는 폐허 근처의 야생화를 모아 책갈피를 만들었다.

칼릭은 돌무더기를 조금씩 다듬어 무너진 제단의 일부를 복원해나갔다.

그에게 있어 이 작은 행동은 단순한 복구가 아닌, 기억과 약속을 되새기는 의식이었다.

“이 세계에 법은 없어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있다.”

칼릭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정의란 건 멀리 있는 게 아니야.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행동하는 것.”

어느 날 저녁, 아렌은 벽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신들이 사라진 세상은 텅 비어 보였지만, 그 빈자리에 우리가 무엇을 채울 수 있는지를 이제 알겠어.”

 

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신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남기는 발자국이 중요해졌으니까.”

세 사람은 작은 폐허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엔 그 누구의 길도 아닌, 오직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새로운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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