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열린 문을 통과하자, 공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모래와 바람의 냄새가 감돌았다면, 이곳은 차갑고 습기 어린 공기 속에 오래된 흙과 이끼의 향이 가득했다.
빛은 거의 들지 않았지만, 아렌의 허리춤에 고이 간직해둔 벨루미아가 은은한 보랏빛을 뿜어내며 주위를 밝혀주었다.
그 빛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벽면의 문양들과 공명했고, 길을 안내하듯 희미한 빛의 줄기를 만들어냈다.
"이 꽃이… 우리를 이끌고 있어." 레나가 놀란 듯 속삭였다.
아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되뇌었다.
벨루미아는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신들의 축복을 담은 주요한 신의 꽃이자, 잊혀진 진실을 향한 열쇠였다.
그의 손에 들린 이 꽃이, 지금은 이 고대 유적의 깊은 비밀을 열어가는 하나의 문이었다.
회랑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자, 벽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점점 더 정교해졌고, 일부는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문양들은 세 개의 왕국과 신들의 이름,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의 오래된 약속을 상징하고 있었다.
벽화 속에는 한 남자가 늘 등장했다.
그는 아렌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왕국의 몰락과 신들의 퇴장을 지켜보는 존재로 그려져 있었다.
그 순간, 칼릭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에 무언가 있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넓은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석상처럼 생긴 거대한 존재가 무릎을 꿇고 있었고, 손에는 고대의 창을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잠들어 있는 수호자 같았다.
그 주변에는 빛나는 고리 형태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바닥은 검은 수정처럼 반사되어 하늘을 비추는 듯 보였다.
"건드리지 마." 레나가 낮게 경고했다.
"이건… 시험일지도 몰라."
하지만 마치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아렌의 손에 들린 벨루미아가 강하게 빛을 뿜어냈다.
그 순간, 석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고대어로 무언가를 읊조리며 거대한 존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아렌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계승자의 향기다…”
그 목소리는 돌이 갈리는 소리 같았지만, 그 안엔 명확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경계와 호기심, 그리고 아주 오래된 슬픔.
수호자는 천천히 일어나 아렌에게 다가왔다.
레나와 칼릭은 무기를 쥐려다 멈추었다.
수호자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공간 전체가 울렸다.
“너는 누구인가. 왜 신의 꽃을 지니고 이곳에 왔는가.”
아렌은 벨루미아를 가슴에 품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아렌. 지혜의 왕국의 이름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자. 그러나… 이 꽃이 나를 이끌었고, 진실이 나를 여기에 데려왔다. 나는 알고 싶다. 신들이 떠난 이유와, 내가 누구인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호자는 아렌의 눈을 바라보더니, 거대한 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너는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인가?”
“무섭지만… 외면할 수는 없어.”
그 말에 수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등 뒤, 암흑 속에서 또 다른 문이 떠오르듯 나타났다.
고대의 무늬로 장식된 그 문은 바위에 박힌 듯 단단했고, 빛을 품고 있었다.
“이 문 너머에는 네 조상의 기억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조심하라. 기억은 축복이자 저주이니.”
그 말과 함께 수호자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아렌은 조심스레 벨루미아를 들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서자 문이 흔들리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쪽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왔고, 그 안에선 낮게 속삭이는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분명 목소리였다.
그의 조상이 남긴 기억, 잊혀진 진실의 조각들, 그리고 아렌이 잃고 있었던 운명의 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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