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회색의 경계
길은 점점 낯설어졌다. 초록빛 들판이 점차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안개가 자욱한 회색의 숲이었다. 나무들은 빛을 삼키는 듯 어두웠고, 땅은 부드럽지만 어디론가 꺼져버릴 듯한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은… 살아있는 것 같아.” 레나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조용하지만, 기운이 흐르고 있어. 이 숲은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군.” 칼릭도 검을 느슨히 쥐며 조심했다.
아렌은 벨루미아의 씨앗을 품에 안고 천천히 걸었다. 꽃은 이미 사라졌지만, 남은 씨앗은 아직도 따스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누군가의 신탁이 아닌, 자신들의 감각과 믿음으로만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숲속을 걷던 중, 그들은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멈춰 섰다. 나무의 껍질에는 손으로 새긴 듯한 고대 문양이 남아 있었다. 무늬는 낯설었지만, 아렌은 어딘가 익숙함을 느꼈다.
“이건… 이 세계가 다시 태어나기 전, 신들의 전쟁 당시 쓰였던 보호의 인장과 비슷해.” 아렌이 말했다.
레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순간, 나무는 미세하게 떨리며, 발밑의 땅이 부드럽게 열렸다. 아래로 이어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이런 곳에 또 다른 공간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칼릭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는 작은 석실이 있었고, 벽엔 수많은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도, 신들의 문자도 아니었다.
“이건… 꿈의 언어야.” 아렌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꿈의 언어?” 레나가 되묻자, 아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현실이 되지 못한 가능성의 말들. 이건 신들의 권능 이전에 존재한, 창조의 근원 같은 거야.”
그때, 석실의 중심에서 조용한 빛이 일었다. 작은 수정이 떠오르며, 공간 전체를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벽면에 드리워졌고, 그 그림자 속에서 또 다른 형상들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세 사람의 과거였다. 아렌의 고향 마을, 레나의 어릴 적 언덕, 칼릭이 전쟁터에서 잃은 친구의 모습.
“우릴… 비추고 있어.” 레나가 조용히 말했다. “이건 기억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은 후회와 바람.”
아렌은 걸음을 옮겨 석실 한가운데로 갔다. “이 공간은 우리를 시험하는 게 아니야. 받아들이게 하는 거야.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세 사람은 나란히 석실 중심에 섰다. 수정의 빛은 점점 잦아들었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부드러운 기운과 함께, 벽에 새겨진 한 문장이었다.
_“기억은 너희를 구속하지 않는다. 너희가 기억을 품을 수 있을 때, 진정 자유로워질 것이다.”_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석실을 나와, 다시 회색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밖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단단했다. 빛이 없는 길이라도, 이제 그들에겐 잃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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