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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계율을 깨다》

제21장: 신이 없는 세계

by digital-nagane 2025. 3. 23.

제21장: 신이 없는 세계



아렌의 손끝이 수정 구체에 닿는 순간, 빛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눈을 감았지만,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 무수한 소리들이 동시에 울리는 듯한 착란 속에서, 그는 천천히 무의식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심장의 방이 아니었다. 평범해 보이는 들판. 부드러운 바람과 새소리. 하늘엔 구름이 떠 있고, 멀리 산과 강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어디지?”

곁을 둘러보니, 레나와 칼릭도 있었다. 그들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건가?” 레나가 물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이곳은 현실 같았지만, 진짜 현실은 아닌 듯한 어색한 조화가 느껴졌다. 모든 것은 너무 완벽했고,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이전의 신들과는 다른,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곳은 네가 만든 첫 번째 현실이다.”

아렌이 숨을 멈췄다. “내가… 만든…?”

“너는 신들의 핵에 접속했다. 그 순간부터, 너는 설계자가 되었다. 이 세계는 네 기억과 바람, 그리고 무의식의 틈에서 탄생한 것이다.”

레나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칼릭은 검을 잡은 손을 천천히 풀었다.

“하지만 모든 창조에는 대가가 따른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신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 말과 함께, 들판 너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태를 알 수 없었지만, 점점 가까워질수록 아렌은 그것이 자신이 만든 세계의 균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어.”

“너는 균형을 잃었다. 바람과 감정, 정의와 복수, 사랑과 증오—너의 내면이 흔들리면, 이 세계도 함께 흔들릴 것이다.”

아렌은 정신을 다잡았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설계하겠다. 더 나은 세계를.”

그러나 목소리는 냉정하게 말했다.

“신들은 너에게 계율을 주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너 스스로 계율을 만들고, 그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한다.”

그 순간, 대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들판의 꽃들이 시들고,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아렌의 심장이 요동쳤다. 벨루미아가 흔들리며 빛을 잃기 시작했다.

레나가 외쳤다. “이대로면, 모든 게 무너져!”

칼릭도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결단을 내려! 지금이야!”

아렌은 벨루미아를 꺼내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내가 만든 세계는 내가 감당하겠다. 나는 신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엔 신이 필요하지 않다.”

그 말과 함께, 그는 벨루미아를 땅에 심었다. 그 순간, 붉게 타오르던 하늘이 멈췄고, 균열이 멈칫했다. 그리고 땅 속에서 희미한 빛이 퍼져나갔다. 새싹이 돋아났고, 바람이 다시 불었다.

벨루미아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신이 만든 이야기를 벗어났어.” 아렌이 숨을 내쉬었다.

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해.”

칼릭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들의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있었다. 이제, 그 누구의 뜻도 아닌 **자신들의 뜻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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