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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계율을 깨다》

제45장. 기억과 석판

by digital-nagane 2025. 4. 18.

 

에테리안을 떠난 아렌 일행은 두 번째 목적지인 드라켄발 왕국으로 향했다.

전쟁의 왕국이라 불리는 이곳은 진실보다는 힘을 우선시해온 곳이었고, 왕족과 귀족, 검과 기사가 나라를 이끌어온 역사로 점철된 땅이었다. 그러나 벨루미아의 파동 이후, 드라켄발 또한 변화를 거부할 수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성벽 너머로 피어오르는 신호 연기를 보았다.

검은 깃발과 붉은 봉화.

그것은 드라켄발에서 가장 신성한 의식, ‘불의 결단’의 상징이었다.

진실에 대한 회의와 수용,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왕궁의 검 시험이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여기선 말이 통하지 않아.”

이안 경이 말했다.

“여긴 설득이 아닌 증명이 필요해. 검과 영혼으로 진실을 증명해야 한다.”

왕궁으로 향하는 도중, 그들은 드라켄발의 총사령관이자 왕의 막내 아들 칼란의 출현을 마주하게 되었다.

붉은 망토를 두른 젊은 장군은 무기를 들지 않은 채 아렌 앞에 섰다.

 

“당신이 진실의 중재자인가?”

“나는 아란티우스의 이름을 계승한 자입니다.”

아렌이 대답했다.

칼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무릎을 꿇었다.

 

“그 이름은 오래전 전쟁 연대기 제1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과 인간의 협약이 무너진 날, 한 자가 칼을 내려놓고 진실을 품었다고.”

그의 무릎 꿇음은 복종이 아닌 선택이었다.

드라켄발이 아렌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닌, 그를 통해 신의 흔적을 재확인하고자 함이었다.

그들은 왕궁 안쪽의 석회 계곡으로 인도되었다.

수백 년간 봉인된 고대 유적, 검의 석판이 그곳에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신의 계약이 깨진 직후, 첫 번째 검과 함께 기억의 진실이 석판에 새겨졌고, 아무도 그것을 해독하지 못했다고 전해졌다.

 

“이 석판이 진실이라면, 벨루미아는 반응할 겁니다.”

아렌은 조용히 말했다.

그는 벨루미아를 석판 위에 올려놓았다.

곧, 석판 표면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빛을 품기 시작했다.

벨루미아의 꽃잎이 넓게 펼쳐지며 여섯 번째 잎맥이 서서히 피어나고 있었다.

레나는 숨을 삼켰다.

“여섯 번째…?”

“선언입니다.”

라움이 중얼거렸다.

“진실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순간… 그건 선언이에요.”

석판 위에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칼란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왕국의 근본 계율이야. 우리가 잊고 있던 신의 맹세, 인간이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여기에 있었군.”

아렌은 석판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석판이 빛을 품고 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실체 없는 영혼의 칼—진실을 증명하는 자만이 쥘 수 있는 기억의 검이었다.

아렌이 손을 뻗자, 검은 천천히 그의 손에 안겼고, 그 즉시 빛의 파동이 계곡 전체에 퍼졌다.

 

“이제… 드라켄발도 진실을 선택할 시간입니다.”

칼란은 조용히 검을 꺼내 아렌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네 편이다. 하지만, 내 형은 아닐지도 모른다.”

왕의 장남이자 실질적인 후계자인 제르만은 무력과 정복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인물이었다.

그 역시 이 진실을 눈앞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계곡 너머로 수십 명의 기사들이 말을 몰아 몰려오기 시작했다.

 

“왕의 명으로, 이단을 체포하라!”

레나는 검을 뽑았고, 칼릭은 진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렌은 조용히 말했다.

 

“검이 아닌, 진실로 대하겠습니다.”

그는 벨루미아를 높이 들었다.

빛은 하늘을 가르고, 계곡 전체에 계약의 룬이 나타났다.

그것은 왕국의 오랜 기억이 깨어나는 신호였다.

그리고 벨루미아의 여섯 번째 꽃잎이 완전히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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