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켄발에서의 진실 결투 이후, 아렌 일행은 마지막 목적지인 실비안 숲으로 향했다. 세 왕국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땅으로 불리는 이곳은 인간과 정령, 고대의 생명이 공존하는 유일한 영역이자, 신의 흔적이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장소였다.
실비안은 공식적인 왕국이 아니라, 정령족의 회의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그들의 수장은 ‘엘리아’라 불리는 고대 신관이었고, 인간의 언어보다 감각과 상징으로 소통하는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
숲에 들어선 순간, 아렌은 공기의 결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 자체에 울림이 있었고, 발걸음 하나하나가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벨루미아는 조용히 빛났고, 그 꽃잎은 이제 일곱 개째. 완전한 형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곳은 기억이 살아 있는 땅이야.” 레나가 낮게 말했다. “숲의 모든 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해.”
그들은 실비안의 중심, 별의 샘이라 불리는 곳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엔 바위가 아니라 수정으로 된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엔 정령의 문양이 떠 있는 공중의 고리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엘리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숲의 의지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아렌은 조용히 제단 앞에 벨루미아를 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벨루미아에서 일곱 번째 꽃잎이 완전히 피어났다.
그 빛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은은했지만, 더 강력했다. 빛이 퍼져나간 곳마다 나무와 풀, 돌과 바람이 반응하며 한 문장을 속삭였다.
“진실은 모든 생명에 귀속된다.”
그 목소리는 바람이었고, 물결이었으며, 동시에 숲 전체였다. 실비안은 지금,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때, 숲의 깊은 곳에서 형체 없는 존재가 나타났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수천 개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기억의 정령체’였다. 그 존재는 벨루미아 앞에 멈춰 섰고, 곧 아렌의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아렌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을 보았다.
그것은 신들이 떠나던 날의 기억이었다. 세 왕국이 갈라지기 전, 인간과 정령이 하나의 언약을 맺던 밤. 벨루미아는 그 중심에 있었고, 한 아이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그 아이는 웃고 있었고, 그 옆에 오늘의 아렌과 똑같이 생긴 인물이 서 있었다.
“그 아이… 누구야?” 레나가 물었다.
“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아렌이 속삭였다. “그건… 이름을 갖기 전의 나.”
빛이 사라지자, 엘리아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마치 안개처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란티우스. 당신은 이름을 완성했어요. 이제 이 세계는 새로운 언약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숲의 중심에서 새로운 벨루미아의 씨앗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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