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계율을 깨다》

제29장. 진실의 목소리

digital-nagane 2025. 4. 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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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 일행이 신전을 빠져나왔을 때,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그 붉은 기운은 단순한 석양이 아니었다.

바람은 무겁게 가라앉았고, 공기 중에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진동이 감돌았다.

마치 세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상해…”

레나가 주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들어갔을 땐 낮이었는데… 며칠은 지난 것 같아.”

“기억의 문은 시간조차도 흐름을 다르게 만들지.”

칼릭이 낮게 대답했다.

 

“우리가 현실을 떠나 있는 동안, 세상에도 변화가 있었을 거야.”

아렌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손안에 쥔 벨루미아를 바라보았다.

꽃은 빛을 잃었지만 시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선명한 보랏빛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아렌이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세 사람은 조용히 산길을 내려왔다.

그 길은 오래 전 신전을 지은 이들이 사용했을 길이었고,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밟지 않았던 듯 수풀과 이끼가 무성했다. 하지만 그들 앞엔 작은 족적들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누가 먼저 우리 소식을 알게 된 걸까…”

레나가 낮게 말했다.

“진실은 언제나 누군가에겐 위협이 되지.”

아렌이 대답했다.

 

마을로 돌아가기 전, 세 사람은 폐허가 된 오래된 수도원에 잠시 몸을 숨겼다.

그곳은 아렌이 어릴 적 몇 번 들렀던 기억이 있는 장소였다.

벽에는 신들의 상징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무너진 제단 위엔 덩굴이 뒤엉켜 있었다.

그러나 공간은 여전히 조용했고, 무언가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여기서 잠시 계획을 세우자.”

아렌이 말했다.

“이 진실을 어디부터,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생각해야 해.”

 

그는 천천히 제단 위에 벨루미아를 올려놓았다.

꽃은 아주 희미하게 빛나며, 마치 그 공간에 반응하는 듯 흔들렸다.

그 순간, 수도원의 벽면에 새겨진 문양 하나가 반응하며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건…?”

레나가 놀란 목소리로 다가섰다.

 

문양은 점점 선명해졌고, 마침내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의 것도, 신의 것도 아닌 목소리였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새겨진 존재가 남긴 음성.

 

“진실을 본 자여, 너의 길은 선택을 요구받으리라. 세상은 귀를 닫았고, 눈을 감았으며, 진실은 종종 배신당하였느니라.”

 

아렌은 그 말을 조용히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는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다시 읽는 듯한 감각에 빠졌다.

그 속엔 고통도, 용기와 희망도 있었고, 무엇보다 외면당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세상은 진실을 두려워한다.”

아렌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 두려움을 넘어서야 해.”

 

그는 다시 벨루미아를 손에 들고, 레나와 칼릭을 바라보았다.

 

“우리 셋은 이제 돌아갈 수 없어. 진실은 우리를 선택했고, 우리는 그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야 해.”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칼자루를 다잡았다.

“그럼 준비하자. 이제부터는 싸움이 될 수도 있어.”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렌의 눈에는 오히려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진실은 이제, 말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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