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계율을깨다 7

제55장 – 벨루미아의 각성

천상의 회랑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는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마치 숨죽인 분노가, 또는 오래된 기억이 깨어날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공기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아렌은 느꼈다.자신이 들고 있는 이 작은 벨루미아의 꽃이,이 공간의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그의 손바닥 위에서 보랏빛 꽃잎이 서서히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처음엔 희미했지만, 이내 꽃 중심에서 은은한 파동이 퍼지더니 회랑 전체를 감쌌다.빛의 존재가 반응했다.아렌이 들어온 순간부터 오직 관조자였던 그 존재가 처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회랑 중심에서 움직였다.그 실루엣은 이전보다 더 또렷해졌고, 빛은 점점 격렬해졌다.“그것은…”존재가 말했다.“신이 남긴 마지막 생명.벨루미아의 각성은 곧… 계약의 균열을 의미한다.”..

제54장 – 천상의 회랑

천상의 회랑은 고요했다.아니, 고요함을 가장한 어떤 거대한 의식의 숨결이 느껴졌다.빛으로 이루어진 문을 지나자, 세상의 이면처럼 펼쳐진 공간이 아렌과 레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벽은 별빛처럼 반짝이는 문자들로 덮여 있었다.그 문자는 아렌이 어릴 적부터 꿈속에서 본 형상과도 같았다.“…여긴 현실이 맞을까?”레나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신화 속에만 존재한다는 곳이었어.신들이 인간에게 계율을 전달하던 곳.여기서, 최초의 계약이 맺어졌다고 했지.”아렌은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그때, 발밑의 문양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그리고 회랑의 중심, 하늘에서 빛으로 된 형체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인간의 자손이여.”그 존재는 형체가 없었다.빛과 그림자가 교차하..

제53장 – 선택의 문 앞에서

“그럼 지금… 우린 어디로 가야 하지?”레나의 목소리는 떨렸다.칼릭의 고백 이후, 신전 내부는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그가 남긴 석판의 메시지는 단순한 진실을 넘어선 신들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아렌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석판 앞에 섰다.그 위에 새겨진 고대 문자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아렌의 시선을 붙잡았다.『진실은 선택을 요구하고, 선택은 희생을 요구한다.』“이건… 신이 남긴 경고야.”아렌이 중얼였다.레나가 그의 옆에 섰다.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슬픔이 담겨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결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칼릭이 말한 것처럼… 신들이 우리 운명을 조종하고 있었다면,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걸까?”“하지만,” 아렌이 말했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옳..

제52장 – 가면 너머의 진실

바람이 멈추었다.그 순간, 마치 세상이 숨을 죽인 듯했다.황금의 벽화가 빛을 잃고, 신전 내부의 촛불이 하나둘 꺼져가며 공간은 음울한 그림자로 덮였다.“이건... 무언가 잘못됐어.”칼릭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레나는 손에 쥔 벨루미아 꽃을 더욱 세게 움켜쥐며 주위를 살폈다.그리고 그때였다.“이 모든 게… 내 계획이었어.”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아렌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가 서 있었다.빛 속에 감춰졌던 그림자가 형체를 드러냈고, 그 그림자의 주인은…“칼릭…?”레나의 입에서 터져나온 비명 같은 속삭임.믿기지 않는 눈동자 속에서 칼릭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슬픔도 후회도 아닌, 깊은 피로와 오래된 결의였다.“처음부터 이 세계는 잘못된 틀 위에 만들어졌어...

제48장. 세 왕국의 서약

실비안의 숲에서 새로운 벨루미아의 씨앗이 맺히던 날, 세 왕국에 동시에 은빛 파장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기억의 진동이었고,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진실의 울림이었다.아렌은 린벨로 돌아왔다. 연맹 창립을 위한 대회의가 열리는 날, 린벨 성에는 에테리안의 마법 원로 마델, 드라켄발의 장군 칼란, 실비안의 대신관 엘리아가 각각의 대표로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수백 명의 대표단과 조율자들.벨루미아는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완전히 피어난 일곱 송이의 꽃은 그 자체로 기억과 진실, 생명의 순환을 의미했고, 씨앗으로 전이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연회장이 아닌, 린벨 성 외곽에 세워진 고대 원형극장에서 서약은 진행되었다. 그곳은 신과 인간이 처음 맹세를 나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