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회랑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는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마치 숨죽인 분노가, 또는 오래된 기억이 깨어날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공기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렌은 느꼈다.
자신이 들고 있는 이 작은 벨루미아의 꽃이,
이 공간의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손바닥 위에서 보랏빛 꽃잎이 서서히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처음엔 희미했지만, 이내 꽃 중심에서 은은한 파동이 퍼지더니 회랑 전체를 감쌌다.
빛의 존재가 반응했다.
아렌이 들어온 순간부터 오직 관조자였던 그 존재가 처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회랑 중심에서 움직였다.
그 실루엣은 이전보다 더 또렷해졌고, 빛은 점점 격렬해졌다.
“그것은…”
존재가 말했다.
“신이 남긴 마지막 생명.
벨루미아의 각성은 곧… 계약의 균열을 의미한다.”
레나가 숨을 삼켰다.
“계약의 균열?”
빛의 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회랑의 벽이 흔들리며 오래된 장면이 하나 둘 떠올랐다.
거대한 나무 아래, 신들이 인간에게 계율을 속삭이는 장면.
그 계율을 받아들인 자들은 번영을 누렸고, 거부한 자들은 멸망했다.
하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 하나의 씨앗이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바로 벨루미아.
“신도,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니었다.”
아렌이 중얼거렸다.
“이 꽃은… 그 계획 바깥에서 자라난 유일한 존재야.”
그의 손끝에서 꽃잎 하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땅에 닿기도 전에 공기 중에서 스스로 빛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대신, 고대 문자들이 새겨진 석판 하나가 회랑 한가운데서 떠올랐다.
그 순간, 칼릭이 다시 걸어나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눈빛은 더 깊어져 있었다.
이제 그는 아렌의 친구가 아니었다.
신의 의지를 품은 대행자, 신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자.
“멈춰.”
칼릭이 말했다.
“그 꽃이 완전히 피기 전에, 파괴해야 한다.”
“이 꽃은 살아있어, 칼릭.”
아렌은 단호히 맞섰다.
“그 어떤 계율보다도 오래된 기억을 담고 있어.
우리가 믿어온 계율이 모두 진실이었다고는 할 수 없어.”
“네가 본 것들은 왜곡된 기록일 뿐이야.”
칼릭은 속삭였다.
“진실을 본다고 해서, 모든 이가 구원받는 건 아니야.
때로는 무지가 평화를 낳는다.”
레나가 칼릭 앞을 막아섰다.
“그렇다면 왜 네가 진실을 밝히려 했던 거야?
네가 원한 게 단순한 진실이 아니었다는 건 우리 모두 알아.”
칼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서서히 떠올랐고,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빛의 존재가 칼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는 선택받은 자였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것이 곧 신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칼릭은 고개를 들었다.
“신의 의지가 흔들린다면, 그 빈틈을 내가 채우겠다.”
그 순간—
아렌의 가슴에서 벼락처럼 빛이 터져 나왔다.
벨루미아가 완전히 피어난 것이다.
이제는 꽃이 아니었다.
그는 작은 씨앗을 내뿜었고, 그 씨앗은 빛으로 변하며 아렌의 심장에 흡수되었다.
“이건…”
빛의 존재가 낮게 말했다.
“계약의 씨앗.
신과 인간 사이의 조약이 처음 맺어졌던 자리에서만 발현되는 유일한 힘.”
아렌은 숨을 들이쉬며 외쳤다.
“이제, 나의 선택을 선언하겠다.”
회랑은 울렸다.
아렌의 몸에서 퍼지는 빛이 회랑 전체를 메웠고, 모든 벽과 천장이 고대 문자로 뒤덮였다.
그 문자는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했다.
『계율은 절대가 아니다.
진실은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운명은 선택하는 자에게 열린다.』
빛의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계율은 다시 쓰인다.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칼릭은 검을 꺼냈다.
그러나 그 순간, 회랑의 문이 스스로 닫혔다.
“너와의 싸움은 다음이다.”
아렌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진실의 문 너머로 가야 해.”
레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함께 새로운 계율을 쓰자.”
그리고 그들은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엔 신 없는 세계,
혹은 신보다 더 오래된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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