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신전을 떠나 린벨 백작의 성채에 도착하기까지는 반나절이 걸렸다.
린벨 영지는 군사적으로 견고한 지역이었고, 성채는 고지대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
성벽은 두터웠고, 망루 위 병사들의 창끝은 조금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 차가운 시선을 뿜고 있었다.
“백작님께서 손님을 직접 맞이하진 않을 겁니다.”
이안 경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 상황이라면… 먼저 시험부터 할 가능성이 크죠.”
그들의 예상대로였다.
성문은 열렸지만, 환영은 없었다.
백작의 하인이 안내하는 대로 깊은 내실로 들어간 아렌 일행은, 무기 소지가 제한된 채 회의실처럼 꾸며진 석실에 머물게 되었다.
벽은 두껍고, 마치 오래된 재판소처럼 한기와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두 명의 인물이 들어왔다.
앞에 선 이는 은빛 자수로 장식된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의 남자, 린벨 백작이었다.
그의 옆에는 날카로운 눈매의 마법사가 동행하고 있었다.
그는 린벨의 오랜 자문관이자, ‘지아드’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엘드란의 이안 경이 이런 시기에 직접 이곳까지 오다니, 세상에 무슨 바람이 불고 있는 걸까요.”
린벨 백작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 안에는 경계와 냉담이 섞여 있었다.
이안 경은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백작께 숨길 뜻은 없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귀족이라는 권위조차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죠.”
린벨의 눈이 아렌에게 향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신의 꽃’을 지녔다는 젊은이인가.”
아렌은 가슴에서 벨루미아를 꺼냈다.
성채 안에서도 꽃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이 석실의 장식들을 비추자, 한쪽 벽면에 희미했던 문양 하나가 반응하듯 떠올랐다.
지아드가 한 걸음 다가오며 외쳤다.
“이건 방해 마법입니다. 시각 계열 환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계하십시오, 백작님.”
“이건 환상이 아닙니다.”
아렌이 단호히 말했다.
“불탄 신전에서도 이 빛은 숨겨진 기억을 보여주었고, 이안 경은 그 기억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건 누군가의 마법이 아니라, 신이 남긴 유산입니다.”
린벨 백작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증거는 신비롭지만, 그 신비는 때때로 거짓의 장막이기도 하지요. 진실은 말이 아닌 의도에 담긴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젊은이?”
아렌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귀족들의 조작된 과거를 되짚으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건, 신들과 인간이 함께 만들었던 세상의 원형입니다. 그 진실을 다시 마주하지 않으면… 이 땅은 반복된 배신 속에 무너질 겁니다.”
린벨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상적이지만… 그런 말이 세상을 움직이지는 않죠. 하지만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이야기의 무게는 달라지겠지요.”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 기억을… 나에게도 보여주시오.”
아렌은 벨루미아를 조심스레 백작의 손 아래 가져갔다.
그 순간, 방 안의 온도가 달라졌다.
빛은 벽면의 문양을 타고 번졌고, 공중에는 희미한 영상이 나타났다.
고대의 제단, 신과 인간의 맹세, 그리고 귀족들의 비밀 회합… 기억의 파편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린벨 백작의 눈이 서서히 흔들렸다.
그는 손가락을 움켜쥐었고, 눈앞의 영상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침묵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많은 것이 바뀌겠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이안 경이 말했다.
“이 진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누가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가 중요하죠.”
린벨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협력하겠습니다. 하지만 내 궁정 안에, 이 진실을 반대하는 자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지아드는… 내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의 눈은 늘 진실보다 권력을 좇았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 문 밖에서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누군가 이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렌은 조용히 벨루미아를 감쌌다.
“진실은 드러났지만, 아직 받아들여진 건 아닙니다. 이제 싸움은 진심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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