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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나그네] 꽃 감성 시리즈 ② – 바람 따라 기울던 튤립처럼

digital-nagane 2025. 4. 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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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은 특별한 향기가 없다.
장미처럼 짙은 유혹도 없고, 벚꽃처럼 눈처럼 흩날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매년 봄이 오면, 어김없이 튤립을 보러 간다.

튤립은 봄의 중턱에서 가장 또렷한 색으로 피어난다.
그 곧고 단단한 줄기 위에, 단정한 꽃잎을 올린 채 바람을 맞는다.
누구에게도 과하게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다만 자기 자리에 충실하게 선다.

어느 해 봄날, 나는 작은 튤립 정원에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 끝, 조용한 마을회관 뒤편.
튜립들이 한 방향으로 기울어 피어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기울어진 모습이 꼭, 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해 봄, 꽤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결정을 내려야 했고, 떠나야 했고, 보내야 할 것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미련, 후회, 불안, 그리고 아주 작지만 짙은 기대 같은 것들이 얽혀 있었다.

그런데 튤립은, 바람이 불면 조용히 기운다.
무너지지 않고, 꺾이지도 않고, 그저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닮고 싶었다.

튤립은 색도 참 다양하다.
빨간 튤립의 사랑, 노란 튤립의 이별, 보라색 튤립의 존경…
꽃말은 그저 상징일 뿐이지만,
나는 그 색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내 마음을 대입해보았다.

오늘의 나는 붉은 튤립 같았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마음.
어제의 나는 노란 튤립 같았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던 나날.

하지만 튤립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피고, 조용히 서 있고, 바람에 잠시 흔들릴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잎을 접고, 자신의 계절을 마무리한다.

그 정직함이, 그 고요함이 좋았다.
나는 그날 튤립 사이를 걸으며 조용히 마음을 정리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민도,
지금은 그냥 잠시 기울어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다 해내지 않아도 괜찮다.
피어나기만 해도, 바람을 견디기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니까.

튤립은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아무 말 없이, 색으로.
아무 행동 없이, 존재로.


나그네의 시선

튤립은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때론 삶도 그와 같다.
우리는 계속 흔들리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색을 피워내고,
자기 계절을 살아간다.
지금 당신이 기울고 있는 그 방향에도,
빛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