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장. 씨앗의 길
세 왕국이 서약을 맺은 지 일주일 뒤, 린벨 성의 북문을 통해 조용히 한 인물이 출발했다. 그는 왕도에서의 명예도, 연맹의 권한도 내려놓은 채, 단 하나의 물건—벨루미아의 씨앗—을 품고 길을 나섰다.
아렌은 이제 ‘중재자’가 아닌, 순례자로 불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제도가 아닌 사람을 만나는 여정이야.” 아렌은 출발 전, 레나에게 말했다. “진실이 제도 속에 머무르면 곧 잊히게 될 테니까.”
그가 걷는 길은 정해진 루트가 아니었다. 연맹의 행정 구역도, 왕국의 도로도 아닌, 오래전 지도에서 사라진 고대의 마을과 신전, 폐허와 숲의 길이었다. 씨앗은 스스로 방향을 가리켰고, 아렌은 그 흐름에 따라 움직였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루에나’. 신과 인간의 전쟁 이후 버려진 고대의 성소였다. 황폐한 제단 앞에서 아렌은 조용히 씨앗을 꺼냈다.
그 순간, 마치 바람이 안쪽에서부터 불어오듯 성소 안에 작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돌바닥의 틈에서 아주 작은 새싹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진실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아렌은 씨앗을 그 옆에 묻었다. 씨앗은 은은한 빛을 내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 고요한 파동이 남았다. 이제 그 땅은 단순한 폐허가 아닌, 기억이 다시 뿌리내린 공간이 된 것이다.
그는 두 번째 마을, 세 번째 숲, 네 번째 신전으로 향했다. 어느 곳에서도 환영은 없었지만, 씨앗은 반응했고, 사람들은 천천히 이야기를 들었다.
“신이 돌아온 것이냐”고 묻는 노인도 있었고,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었느냐”고 되묻는 아이도 있었다.
그 여정에서 아렌은 벨루미아를 펼치지 않았다. 이제 기억은 꽃이 아닌, 이야기로 전해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나, 아렌은 한 외딴 산골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외부와 단절된 땅이었지만, 놀랍게도 마을 중심에 조용히 피어난 벨루미아가 있었다.
그를 본 마을 아이가 물었다.
“당신이 벨루미아 씨를 뿌린 사람이에요?”
아렌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그 씨앗이 흙을 만날 수 있도록 한 사람일 뿐이야.”
그 아이는 씨앗 옆에 있던 벤치에 조용히 앉아 벨루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 꽃이 언젠가 나한테 말을 걸어줄까?”
아렌은 미소 지었다. “네가 언젠가 진실을 묻는다면, 그 꽃은 반드시 대답할 거야.”
그날 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언덕 위에 또 하나의 씨앗을 묻었다.
그리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조용히 다짐했다.
“기억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이 세계가 잊지 않도록 걷는 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