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계율을 깨다》

제32장. 첫 번째 동맹

digital-nagane 2025. 4. 12. 18:59

 

기억의 조각이 벽에 사라지고 난 후에도, 방 안은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이안 경은 무겁게 숨을 내쉬며 벽에 손을 얹었다.

고대의 돌에 새겨진 문양이 그의 손끝에서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이제 진실을 보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 진실이… 오래전부터 묻혀 있었던 것이 맞다면,”

이안 경이 말했다.

 

“우리 가문 역시, 이 거짓의 사슬 위에 서 있었던 셈이지.”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건 과거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이안 경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좋소. 이 진실을 세상에 전하는 길, 내가 함께하겠소.”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 순간, 회랑 안의 공기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빛의 입자들이 벨루미아 주위를 맴돌았고, 그것은 마치 새로운 계약을 축복하는 신들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레나와 칼릭은 뒤에서 조용히 그 장면을 지켜보며 서로의 시선을 맞췄다.

 

그들이 오랜 여정을 통해 마주한 진실은 이제, 현실을 바꾸는 첫걸음이 되고 있었다.

 

“우선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안 경이 말을 이었다.

 

“귀족 중 일부는… 이미 이 진실의 조짐을 눈치채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반격해올 것입니다. 우릴 음해하고, 진실을 왜곡하려 할 테지.”

 

“그래서, 동맹이 필요합니다.”

아렌이 말했다.

“당신 외에도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이 있다면—그들을 모아야 합니다.”

이안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두루마리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이 근방에서 가능성이 있는 가문은 두 곳. 남동쪽의 린벨 백작가, 그리고 북서쪽의 베르탄 후작가. 린벨은 신중하고 원칙적인 인물이고, 베르탄은 과거부터 신의 유산에 관심이 많았지.”

 

레나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접근 방식이에요. 우리가 무작정 찾아가면 경계심부터 살 거예요.”

 

이안 경은 작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있잖소. 그들이 나를 믿고 있진 않더라도, 내 이름 앞에선 적어도 칼을 들지 않겠지.”

 

“그럼, 누구부터 접촉하실 생각인가요?”

아렌이 물었다.

“린벨 백작부터지.” 이안 경이 곧장 대답했다.

“그는 합리적인 자요. 나와 직접 대화를 나누려는 의지도 있을 겁니다.

다만, 베르탄은 조금… 더 복잡하오.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겠지.”

 

그 순간, 바깥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회랑에 울렸다. 경계병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경!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 하지만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오?”

“린벨 영지 외곽의 신전이 불탔다는 소식입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불을 지른 듯합니다.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직접 확인하셔야 할 듯합니다.”

 

순간,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이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군.” 이안 경이 낮게 말했다.

 

“진실이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자들이 먼저 칼을 뽑았어.”

 

아렌은 벨루미아를 가슴에 안고 중얼거렸다.

 

“진실이 빛을 낼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지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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